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와중에 30만 명의 흑인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갔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 된다.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하나의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프랑스 역사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자부심도 덜 가질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니, 피투성이의 세월조차도 그저 말뿐, 새털보다 가벼운 이론과 토론에 불과해서 누구에게도 겁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재등장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몇 장의 사진을 보곤 감격했다. 그것이 내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 사람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해주었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그것이 지닌 순간성이란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었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는 해를 받아 오렌짓빛으로 변한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서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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