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읽은 노트

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중 2

peppi 2025. 4. 1. 20:46

시민적 주체에 필수 불가결한 '광기'

 

지젝의 코기토 해석은 코기토 자체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에 빚지고 있다. 지젝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회의는 우리가 어떻게 자연(혹은 객관성)에 함입된 존재에서 문화(혹은 주체성)로 지탱되는 존재로 변모하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지젝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1724~1804)나 헤겔의 작업이 이런 변모과정의 문제에 부쳐진 것이라고 보았다.


어떻게 우리는 단지 자연 혹은 객관 세계의 일부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말하는 존재로서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주체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가? 이 간극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헤겔과 칸트는 문화가 마치 마술처럼 갑자기 인간 존재에게 부여된다고 가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자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문화(지책이 로고스logos, 말 Word 등으로 명명한)도 아닌 상태를 창조해야 했다. 가령, 헤겔은 이 '사이존재'를 절반은 자연에 속박되어 있고, 절반은 자연을 노예화하려는 '흑인negroe' 상태로 불렀다.

 

지젝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 잃어버린 고리를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찾았다. 지젝은 데카르트적 회의 과정을 자기로의 철회, '화덕 속으로의 육체적 철회'로 묘사한다.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을 세계와 단절시킨다. 오직 코기토만 남을 때까지 모든 외부세계와의 고리를 체계적으로 단절시킨다. 지젝은 바로 여기, 이 전면적인 철회의 제스처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 감춰진 이행을 발견했다. 지젝에 의하면, 이런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헤겔의 '세계의 밤night of the world' 이 지닌 특수한 광기)이다.


주마등 같은 허깨비들 속에서 순수한 자기self가 존재하는 이 밤, 그 자연의 내부는 피투성이 머리가 튀어나오고 하얗게 질린 유령들이 불쑥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모든 것을 감싸는 밤이다. 눈眼 속에 비친 인간 존재를 볼 때 우리는 그 밤을 언뜻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소름 끼치는 공포가 된다.(CATU : 258)


상징적 우주 또는 문화적 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 혹은 (광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해지는 때는, 이 '세계의 밤'에 의해 현실이 소거된 때, 세계가 그 자체로 상실 또는 절대적 부정성으로 경험될 때뿐이다. 데카르트의 '자기로의 철회'는 정확히 이 극단적인 상실의 경험이다.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책은 바로 여기,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지젝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문화 상태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이 공백 때문이다. 만약 사물(혹은 대상)과 그것의 재현 표상(혹은 말)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다면, 그 둘은 동일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체성의 여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言은 애초에 우리가 사물을 '살해'한 한에서만, 말과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 사이의 간극을 창출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간극, 자연과 그것에 함입된 존재들 사이의 간극이 주체이다. 달리 말해 주체는 지젝의 용어로,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지는 매개자' 이다.


여기서 지젝의 요점은,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은 헤겔이 도입한 진화의 서사로 그려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은 그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조직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으로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한다. 지젝은 이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렇게 해서 (사라지는 매개자인) 주체를 광기로 파악한다. 지젝에게 광기는 제정신, 즉 시민적 주체의 '정상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 '사라지는 매개자' 주체 혹은 광기


'사라지는 매개vanishing mediator'는 지젝이『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는 이 개념을 북미의 마르크스 비판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1934~)의「사라지는 매개자: 혹은 스토리텔러로서의 막스 베버The Vanishing Mediator; Max Weber as Storyteller」에서 빌려왔다.

 

이 논문에서 제임슨은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분석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이고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이다. 곧 베버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창출한다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구도를 뒤집은 것이다. 이에 대해 제임슨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와 일치하는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제임슨에 따르면, 이 변증법은 그가 '사라지는 매개자'(두 항들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부른 것에 의해 추동된다.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자라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출현하기 전의 종교는 경제 부문과 분리된 영역이었다. 이에 반해 보편화된 종교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은 노동의 세계를 자기 영역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모든 사람을 부의 축적과 근면한 노동에 매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가 출현할 조건을 창출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출현은 종교,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것(프로테스탄티즘)은 글자 그대로 서로 배타적인 두 항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축매 동인動因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꾸로 종교제도 자체가 변화의 발생 장소이며, 그 쓰임새가 다하면 해체되어 치워질 수 있는 사다리 또는 거푸집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Jameson 1988: 31)


'사라지는 매개자'는 말 그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의 이행을 매개하고 곧 사라지는 개념이다.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바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개념과 형식의 비대칭성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혁명 분석에서처럼 형식은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지체된다. 즉, 내용의 논리가 형식의 한계 지점까지 작동하여 자기 껍질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형식을 드러낼 때까지, 내용은 현존하는 형식의 자장磁場 속에서 변한다. 지젝은 제임슨의 논의를 언급하며 이와 같이 말한다.


"봉건제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이행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부르주아적 일상생활 속의 사적 종교로의 이행과 그 성격이 같지 않다. 첫 번째 이행은 '내용'과 관련된다(종교적 형식을 보유하거나 심지어 좀더 강화된 형식 속에서 어떤 중요한 변화 ㅡ 신의 은총이 나타나는 장으로서의 금욕적-탐욕적 경제활동에 대한 확신 ㅡ 가 발생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이행은 순전히 형식적인 행위, 형식상의 변화이다(프로테스탄티즘이 금욕적-탐욕적 태도로 실현되는 순간, 그것은 형식으로서 떨쳐 버려진다.)"(PFTKN: 185)

 

이런 과정 속에서 지적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 즉 변증법의 세 번째 계기를 발견한다. 첫 번째 부정은 낡은 형식 안에서 그 형식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내용의 변화이다. 두 번째 부정은 형식 자체의 소멸이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것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대립물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종교적 태도의 보편화가 최종적으로는 사적인 묵상의 문제로 치부되는 결과를 낳는다. 즉, 봉건제의 부정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의해 부정된다.

 

2025.03.26 - [못읽은 노트] - 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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