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읽은 노트

밀란 쿤데라/ 커튼 중

peppi 2025. 4. 26. 10:12

이는 우리 (혹은 우리 것이었던) 문명에 속하는 인간 고유 특징 중 하나인 역사적 연속성의 의식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역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일련의 사건과 태도 그리고 작품 들의 논리적인 연쇄로 나타났다. 유년 시절,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 연대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폴리네르칼리그람 다음에 알코올 」을 썼으리라고는 켤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그는 다른 시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또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유명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예술에서 구체적이고 명백한 의미를 지니며, 분명히 다양한 대답들이 존재한다. (...)

 

구조주의 미학의 창시자인 얀 무카로프스키는 1932년 프라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객관적인 미적 가치의 가정만이 예술의 역사환적 진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달리 말해서 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사는 그 연대기적 연속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거대한 작품 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으로 보자면, 미적 가치가 지각되는 것은 예술의 역사적 진화의 맥락에서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객관적인 미학적 가치에 의거해서 나라별로, 역사적 시대별로, 사회 집단별로 고유한 취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역사는 마치 의복이나 장례와 혼례 의식이나 스포츠 혹은 축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한 사회의 역사의 부분을 이룬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백과전서』에서 소설이라는 표제 아래 다룬 내용은 거의 이러하다. 소설 항목을 쓴 조쿠르 경은 소설의 대량 보급(거의 모든 사람이 읽는다.)과 도덕적 영향(때로는 유익하고, 때로는 해로운)은 인정했지만, 소설 자체의 특별한 가치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찬미하는 소설가들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라블레, 세르반테스, 케베도, 그림멜스하우젠, 디포, 스위프트, 스몰렛, 르사주, 아베 프레보,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조쿠르 경에게 소설은 독자적인 예술도, 독자적인 역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라블레와 세르반테스. 백과전서파가 그들의 이름을 올려놓지 않은 것은 별로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라블레는 소설가로 불리는 것에 거의, 아니 전혀 개의치 않았고, 세르반테스는 이전 세기의 환상 문학에 대하여 풍자적인 에필로그를 쓰려 했다.둘 다 자신을 '창시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소설 작법의 실행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지위가 점진적으로, 귀납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가 부여된 것은, 그들이 소설을 처음 쓴 사람들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이 새로운 서사 예술의 존재이유를 다른 작품들보다 더 잘 이해시켰고, 그들의 계승자에게는 위대한 소설적 가치들의 전형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가치를, 즉 특별한 가치, 미적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때무터 비로소 소설들의 연쇄는 하나의 역사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산문-희극-서사적 글쓰기'의 형식은 어떠한가? 필딩은 "문학의 새로운 영역의 창시자로서 나는 이 재판정 안의 법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그에게 비평가들이 될 '문학 관리들'이 강요하려는 모든 규범에 대하여 미리 자신을 변호한다. 소설은 필딩에게 존재 이유(이것은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한 점인데)이자 필딩이 '발견하고자 한' 현실의 영역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소설의 형식은 아무도 제한할 수 없는 자유, 그 발달 과정이 영원히 놀라움의 대상이 될 뿐인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

 

돈키호테의 죽음은 산문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파토스가 결여되어 있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후대에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모습의 인물들을 묘사"했다고 설명해 준다. 그런데 돈키호테 자신은 따라야 할 모범에서 제외된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은 이해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

 

'스토리'의 절대주의적 권력에 항거하여 필딩은 특히 "그가 원하는 곳에서, 그가 원할 때" 자신의 주석과 성찰의 개입에 의하여, 달리 말하자면 여담(digressions)에 의하여, 서술을 방해할 권리를 내세운다. (...)

 

필딩이 말한 바를 되새겨 보자.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糧食)은 인간 본성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극적 행위들이 진실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열쇠일까?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리는 장벽이 아닐까?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가 무의미 아닌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행운일까, 불운일까? 우리의 굴욕일까, 혹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위안, 탈출구, 이상향, 피난처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의외였으며 도전적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트리스트램 샌디』의 형식적 유희 때문이다. 소설의 기술에서는 실존적 발견과 형식의 변형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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