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게의 시는 그 자체가 공감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공감은 체험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이다. 하우게의 시에서 체험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시들이 그것을 자기 증거(evidence)한다.
흔히 경험은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체험은 말로써 옮기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체험을 말로써 옮길 수 있는 말이 시일 것이다. 시는 그런 점에서 경험과학과 구분된다. 철학은 체험을 다루지만 체험에 대한 성찰이라는 의미에서 이차적이다. 시는 반대로 즉각적이다.
여기 체험된 너와 내가 있다. 가령
오늘 달이 두 편 보였다
새로 온 달과 사라진 달
나는 새 달의 존재를 많이 믿지만
새 달은 사라진 달일 것이다
-「 오늘 내게 보였다 」전문
위의 시에는 달이 두 편 나온다. 하나는 경험의 새 달, 다른 하나는 체험의 사라진 달이다. 나는 새 달의 존재를 많이 믿는 경험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라진 달을 이해하는 체험적 존재이다. 오늘이라는 세계에는 경험과 체험이 공존한다. 경험과 체험은 시인의 마음에 동시적이다. 시는 이 동시성에 대한 진술이다.
공감이란 친화력(affinity)이고 친화력은 유사성(analogy)에 기반을 둔다. 즉각적으로 너와 내가 닮아 있음을 발견하는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상찬되었다. 그 사랑의 능력은 너와 내가 하나라는 대승적 실재의 표현일 것이다. 세계라는 구조적 건축물의 기반에서 사랑의 원리를 해체적으로 입도(入道)하는 과정에서 한 줌 시는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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